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 제국 육군/헌병 (문단 편집) == 해체 == 종전 후, 패전으로 군부가 힘이 없어지자[* [[아시아]] 전역의 일본군이 [[미군]]과 [[국민혁명군]] 및 [[영국군|영군]]과 [[소련군]]에 의해 무장해제되었고 곧 [[GHQ]]에서 군대 자체를 해체시켰다.] 그간 민간인들에게 증오의 대상이던 [[특별고등경찰]]과 함께 길거리 집단 린치 대상이 되기도 했다. 이들은 조선인들만 괴롭힌 것이 아니라 일본인을 상대로도 무자비한 정치, 사회적 탄압을 가했던지라 패전 후, 전역 후 귀향시 착용하도록 한 부착물 없는 육군 군복 칼라에 헌병 병과장을 달았던 구멍이 있는 이들은 심심하면 "이놈, 헌병이었구나!" 하며 군중들이 달려들어 줘패는 바람에 고생깨나 했다고 한다.[*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서 헌병 출신이었다가 상관의 명령을 거역해 이오지마 수비대로 좌천당한 병사가 헌병에게 가산을 다 뜯긴 주인공에게 미움받는 묘사가 있다.] [* '''아예 연합군 포로, 강제로 끌려온 조선인, 중국인들도 다 같이 구타에 가담한 경우도 있었을 정도니 말 다했다.'''] 일본 만화 [[동아총통특무대]]에 묘사가 잘 되어 있다. 헌병들은 일제가 점령한 지역에서 민간인에 대한 학대, 학살, [[위안부]] 강제매춘 등 온갖 종류의 전쟁범죄를 일으켰으므로 전후에 전범재판의 대상이 되었다. 조선 땅의 일본 헌병들과 일본인 경찰들은 1945년 9월 초까지 잔류했다. 어디까지나 항복 선언이 8월 15일 [[옥음방송]]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었고, 처음엔 이 방송이 고대 일본어를 쓰고 한자어가 많이 섞여 난해해서 내용을 이해 못 하다 그 다음날부터 사람들이 비로소 조국이 광복됐단 걸 깨닫게 되었다. 그리고 미군은 조선 땅에서 먼 [[오키나와]]에 주둔 중이라 상륙하려면 시간이 걸렸다.[* 지리적 특징이 볼 때 소련군은 만주 작전을 진행하면서 육지적으로 만주와 맞닿은 북한 지역에 바로 진주했지만, 미군은 전쟁 내내 태평양 곳곳의 섬 지역(오키나와 포함)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한반도에 군대를 배치하려면 [[해운]]과 항공기로 전개해야 했으며, 설상가상으로 옥음 방송 송출 시점에서 미군이 한반도로 이동할 준비가 전혀 안된 상태라 준비를 갖추고, 점령 계획을 수립하는 등의 시일을 거쳐 9월이 돼서야 전개했고 그로 인해 일본군 무장해제 및 철수에 시간이 걸렸다. 북한에선 [[소련군]]이 일본군과 직접 전투를 치러 남진하여 1945년 8월 7일 이후 이미 [[함경북도]]와 [[함경남도]]의 바닷가 지역이 [[소련 해군]] [[육전대]]와 [[공수부대]]의 동해안([[라선시|나진]]/[[선봉구역|웅기]]/[[청진]]/[[성진]]/[[함흥]]/[[원산]]) 상륙작전 및 [[기갑부대]]의 [[두만강]] 도하작전으로 진입했으며, 곧이어 [[NKVD]]가 친일파들을 색출하기 시작했다. 소련 군정 담당자인 치스차코프 장군과 로마넨코 장군도 이미 북한에 들어와 있었다. 반면 남한의 군정 책임자 [[존 리드 하지]] 장군은 8월 15일에는 [[오키나와]]에 있었다.] 그래서 8월에서 9월 말까지 한달 반 동안은 [[조선군(일본제국)|조선군사령부]] 헌병대의 일본인 헌병들과 [[조선총독부]] 경무국의 일본인 경찰관들이 계속해서 치안을 유지해야 했다. 이들이 조선인에게 행패를 부리기도 했고 [[경성부]] 전체에 계엄령과 비슷한 상태를 만들기도 했으나 무정부 상태를 만들 수가 없는 노릇이라 할 수 없이 남아 있었다.[* 전술한 것처럼 북한의 경우 [[소련군]]을 따라서 상륙한 NKVD가 보위부와 공안대로 구성된 치안대를 조직해 치안을 유지하기 시작했다. 남한에서 [[미군]]이 미군정청 경무국(군정경찰)을 창설한 것은 1945년 10월에 남한 전역을 확고하게 장악한 이후였다.] 패전 직후 1945년 9월까지만 해도 조선 사람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면 헌병대가 [[http://m.incheon.go.kr/story/sub1_view.jsp?bbs_no=54&bbsctt_no=1913835&nowPage=1&codeNm=2015/08&row_num=10|무력으로 진압]]했다. 물론 도시에서는 여전히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일본인 경찰관들이 치안을 유지하고 있었다. 미군은 조선에서 먼 [[오키나와]]에 주둔 중이어서 상륙 후 항복을 받으려면 시간이 오래 걸려서 그전까진 조선총독부에 치안을 유지할 것을 지시했기 때문이다. 헌병대나 경찰관들이 행패를 부리긴 했지만 서울과 신의주를 비롯한 대도시에서는 일본인의 안전한 철수를 뒷받침했다. 당연히 고등계 등 악명높던 부서에 속한 일본인 경찰관들은 전원 야반도주했고 민생치안을 담당하는 형사계 위주였다. 이러한 이유로 농촌 지역에서는 1945년 9월 초까지 헌병대가 위세를 부렸고 전국 각지의 다양한 도시에서 일본인 [[도지사]]가 [[경찰서장]]들을 지휘하여 독립만세 시위를 진압했으나, 미군이 상륙한 직후에 일본군과 헌병대의 무장해제가 진행되었고, 조선총독부와 조선군사령부를 접수한 [[주한미군]]에 모든 치안업무를 인계한 뒤에 조용히 철수했다. 곧이어 미군정청이 [[일본 육군]]과 [[일본 해군]] 및 일본인 경찰관들과 일본인 민간인들을 [[일본 제국]]의 본토로 추방했으니,[* 제2차 세계대전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연합국들은 여러 회담을 통해 추축국들의 식민지 지역에 대한 처분방침을 확립하고 점령된 국가들은 대부분 해방시켜줬고 기존에 살던 추축국의 인구는 모조리 강제 추방시켰다. 전후 동유럽에서 살던 독일인 1,500-2,000만명이 린치, 학살 속에 독일로 강제 추방된 것이 유명하며 남조선 일본인의 추방도 그 일환이었다. 그나마 이들의 본국송환은 미군의 호위로 별일없이 진행되었으나 북조선의 소련 군정하에 있는 일본인들은 대부분 시베리아로 끌려가 강제노동을 몇년씩 하고 순차적으로 송환되었다.] 최종적으로 1946년 4월이 되면 남한에서의 일본군은 자취를 감춘다.[*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일본인 경찰관들은 1945년 10월까지 모두 [[해고]]되고, 그들은 민간인 신분으로 귀국했다.] 해방 이후 [[대한민국]]에서는 1948년 반민족행위처벌법 제 5조에 따라 헌병, 헌병보의 직에 있던 자는 본 법의 공소시효 경과 전에는 공무원으로 임용할 수 없게 했지만, 실제로는 [[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|반민특위]] 해산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